맨위로가기

쓰카하라 도시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쓰카하라 도시오는 1910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도메이 통신사 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0선 의원을 지냈으며, 요시다 시게루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보수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후쿠다 다케오 파벌에 속해 건설정무차관, 중의원 예산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제1차 사토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장관, 제3차 사토 내각에서 노동대신을 지냈다. 1975년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하고, 오키나와 반환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등 보수 정치 세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노동대신 - 지바 사부로
    지바 사부로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기업인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석유 및 에너지 관련 기업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미야기현 지사와 중의원 의원, 노동대신을 역임하고 자유민주당 내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다가 1979년 사망했다.
  • 일본의 노동대신 - 이시다 히로히데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시다 히로히데는 이시바시 단잔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자유민주당에서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여러 내각의 관방장관, 노동상, 운수상을 역임하며 노동 문제 해결에 힘썼고, 자민당의 위기를 경고하기도 했으나 소련 간첩 의혹 속에 정계를 은퇴했다.
  • 일본의 내무관료 - 마에지마 히소카
    마에지마 히소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우편 제도 창설과 근대화에 기여하여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며, 한자 폐지론 주장, 에도 천도 건의, 철도 부설 기안, 신문 사업 육성, 육운 원회사 창립, 해운 정책 건의, 우편 저축 및 우편환 시스템 도입, 훈맹원 설립 지원, 도쿄 전문학교 설립 지원 등 일본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사회적 불평등 심화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유산에 대한 재평가 또한 존재하는 인물이다.
  • 일본의 내무관료 - 쇼리키 마쓰타로
    쇼리키 마쓰타로는 일본의 언론 재벌이자 정치가로서 요미우리 신문을 인수하고 니혼TV를 설립했으며, 일본 프로 야구 발전에 기여하고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이바라키현 출신 - 미야모토 카나코
    미야모토 카나코는 1989년 이바라키현 출생의 일본 여성 성우이자 가수로, 초등학교 때부터 연기 수업을 받고 2007년 애니메이션 주제가로 데뷔하여 프리큐어 시리즈 음악과 다양한 애니메이션 성우로 활동하며, 건강 문제로 활동을 중단한 후 복귀, 결혼과 출산 후에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이바라키현 출신 - 누카가 후쿠시로
    누카가 후쿠시로는 산케이 신문 기자 출신으로 중의원 의원을 장기간 역임하며 방위청 장관, 경제재정정책 담당 대신, 재무대신 등 주요 요직을 거쳐 2023년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닛폰 카이기와의 관계 및 여러 스캔들 연루 등 논란도 있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쓰카하라 도시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
이름쓰카하라 도시오
원어명塚原 俊郎 (つかはら としお)
출생일1910년 10월 2일
출생지일본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시
사망일1975년 12월 7일
사망지일본 이바라키현
출신 학교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
정당민주자유당 → 자유당 → 자유민주당
칭호/훈장정3위
훈1등
친족 (정치인)장남 쓰카하라 슌페이
정치 경력
직책제32대 노동대신
내각제3차 사토 개조내각
임기 시작1972년 1월 28일
임기 종료1972년 7월 7일
퇴임 이유내각 총사직
직책제14-15대 총리부 총무장관
내각제1차 사토 제3차 개조내각
제2차 사토 내각
임기 시작1966년 12월 3일
임기 종료1967년 11월 25일
퇴임 이유내각 개조
직책중의원 의원
선거구이바라키 2구
당선 횟수10회
임기 시작1949년 1월 24일
임기 종료1975년 12월 7일
퇴임 이유사망
기타 직책[[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15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총재: 사토 에이사쿠)
임기 시작1970년
임기 종료1971년
기타 정보
전직운수대신 비서관

2. 생애

쓰카하라 도시오는 1910년 10월 2일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시에서 태어났다. 이바라키 교육계에서 명교장으로 알려진[1] 교육자 쓰카하라 스에키치의 차남으로, 이바라키현립 미토 제1고등학교, 미토 고등학교를 거쳐 1935년에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도메이 통신사에 입사해 10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전후에는 관계에 입성해 정보국 정보관, 내무성 지방국 여론조사과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에 마스다 가네시치 운수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1949년 총선에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아 구 이바라키 2구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연속 10회 당선되었다. 당내에서 아소 다카키치, 후쿠나가 겐지 등과 함께 요시다 시게루의 측근 그룹에 속했다.

보수합동 이후 자유민주당 소속이 되었고 사토 에이사쿠-후쿠다 다케오 파벌에서 활동했다. 건설정무차관, 중의원 예산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위원장을 거쳐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에서 총리부 총무장관으로 첫 입각했다. 1970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어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반환 문제에 대처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에서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상으로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당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12월 7일, 나카미나토시 공회당에서 열린 자민당 현 연합 나카미나토 지부 확대 총회에서 연설하던 중 급성 심부전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사후 정3위 훈1등에 추서되었다.[2] 그의 지반은 장남 쓰카하라 슌페이가 계승했다.

3. 정치 경력

쓰카하라 도시오는 1949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구 이바라키 2구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는 이케다 하야토, 오카자키 가쓰오, 마에오 시게사부로, 하시모토 류고 등도 함께 당선되었다. 이후 10회 연속 당선되었다. 당내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측근 그룹의 일원이었다.

보수 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 파 - 후쿠다 다케오 파에 소속되었다. 건설 정무 차관, 중의원 예산 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1970년에는 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국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는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 대신에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당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12월 7일, 이바라키현 나카미나토시 공회당에서 열린 자유민주당 현 연합 나카미나토 지부 확대 총회에서 연설 도중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정삼위훈1등에 추서되었다. 1975년 12월 1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이시노 히사오가 추도 연설을 했다.[2]

쓰카하라 도시오는 요시다 시게루의 최측근 그룹 중 한 명으로, 자유민주당 내에서 보수 성향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오키나와 반환 협상 과정에서 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일본의 보수 정치 세력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1. 중의원 의원 활동

쓰카하라 도시오는 1949년 (쇼와 24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구 이바라키 2구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는 이케다 하야토, 오카자키 가쓰오, 마에오 시게사부로, 하시모토 류고 등도 함께 당선되었다. 이후 10회 연속 당선되었다. 당내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측근 그룹의 일원이었다.

보수 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 파 - 후쿠다 다케오 파에 소속되었다. 건설 정무 차관, 중의원 예산 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1970년에는 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국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는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 대신에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다. 당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12월 7일, 이바라키현 나카미나토시 공회당에서 열린 자유민주당 현 연합 나카미나토 지부 확대 총회에서 연설 도중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정삼위훈1등에 추서되었다. 1975년 12월 1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이시노 히사오가 추도 연설을 했다.[2]

3. 2. 주요 정책 및 활동

쓰카하라 도시오는 요시다 시게루 측근 그룹의 일원으로, 보수 합동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 파 - 후쿠다 다케오 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건설 정무 차관, 중의원 예산 위원장, 자유민주당 홍보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 내각에서 총리부 총무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으며, 1970년에는 자유민주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간사장 호리 시게루와 함께 "오키나와 국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2년 제3차 사토 내각 개조 내각에서는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노동 대신에 취임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조인식에 수행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당내에서는 정보부장, 부간사장, 홍보 위원장을 역임하며 주요 직책을 맡았다.

4.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회차지역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선 여부비고
1949년 총선24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민주자유당27,502표15.1%3위당선중선거구제
1952년 총선25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당 (1950년)37,268표18.7%3위당선중선거구제
1953년 총선26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당 (1953년)47,063표22.3%1위당선중선거구제
1955년 총선27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일본민주당40,343표18.3%3위당선중선거구제
1958년 총선28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민주당56,717표23.5%2위당선중선거구제
1960년 총선29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민주당59,526표24.1%1위당선중선거구제
1963년 총선30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민주당64,062표25.6%1위당선중선거구제
1967년 총선31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민주당69,557표28.3%2위당선중선거구제
1969년 총선32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민주당80,268표29.1%1위당선중선거구제
1972년 총선33회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자유민주당76,511표27.3%1위당선중선거구제



쓰카하라 도시오는 모리 기요시의 후임으로 1966년 12월 3일부터 1967년 11월 25일까지 14·15대 총리부 총무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하라 겐자부로의 후임으로 1972년 1월 28일부터 1972년 7월 7일까지 32대 노동대신을 역임했고, 후임자는 다무라 하지메였다.

5. 평가

참조

[1] 간행물 日本一元気第336号【江戸英雄(三井不動産会長)─昭和時代の私の履歴書】 https://archives.mag[...]
[2] 회의록 第76回 衆議院 本会議 第18号 昭和50年12月12日 https://kokkai.ndl.g[...] 国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1975-12-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